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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대책과 차별금지법반대(9)

기사승인 [514호] 2021.04.21  18:4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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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애에 대한 회개를 위한 설교

소기천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예수말씀연구소장)

Q 6 : 35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가 그의 해를 악한 자들과 <선한 자>들 위에 비추고 비를 …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는 행동만이 아니라 입이나 생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행동이나 입으로도 할 수 없는 형편이라면, 비방하는 자나 혹은 박해하는 자를 위해 마음이나 생각으로 기도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비방하는 자나 혹은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어렵지 않고 가능한 일이다. 원수사랑은 행동이나 입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원수를 위한 기도는 마음과 생각에만 머물러도 그 응답은 놀랍게도 이루어지는 특별한 비밀이 있다.

원수사랑은 비방하는 자와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예수님의 인격과 품성을 보여주는 것이지, 인간이 결코 쉽게 흉내 낼 수 있는 덕목이 아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서 삶 속에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비방하는 자와 박해하는 자를 위한 기도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처음부터 포기하는 것은 성도이기를 아예 포기하는 것과 같기에, 예수님의 품성이 나를 감동시키고 감화하도록 항상 성령의 돌보심과 은혜를 구해야 한다.

축복과 기도 그리고 금식, 이 세 가지는 분명히 오늘날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교회에는 부족한 덕목이다. 축복과 기도와 금식의 덕목을 권면하는 열두 사도의 가르침인 디다케 1 : 3b에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 너희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금식하라”는 구절로, 당시에 신앙 공동체를 향하여 저주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원수로 간주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원수를 대하는 태도가 예수님의 토라와 다르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금식하라고 권면한다. 왜 이런 권면을 할까? 기도와 금식 이외에는 원수의 박해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금식기도를 함으로써 인간적인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원수의 박해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을 사모하는 간절한 신앙을 보여주는 것이 디다케의 가르침이다.

더구나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는 가르침은 신명기의 복과 저주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비록 지금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것으로 인해서 저주를 당하지만, 세상의 권력과 군왕들을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을 하게 될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으로 믿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천명하고 있다.

어떻게 이러한 축복과 기도와 금식을 통해서 세상에 가득한 원수들을 이기고 참된 신앙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을까? 요즘 여성신학이 성경에서 하나님을 부성으로 묘사하는 것에 저항하여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까지 칭하는 일도 있지만, 이는 성경적 표현이 아니다. 초기 기독교의 이단 중에서 영지주의는 ‘하나님 어머니’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가, 2세기에 테르툴리아누스와 오리게누스와 이레내우스가 저마다 ‘이단논박’이란 책을 통하여, 그리고 5세기에 에스파니우스가 ‘파나리온’이란 책을 통하여 이단으로 낙인이 찍힌 역사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미 고대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제명된 것을 자유주의 신학이 고개를 들어 다시 여성신학이 그 역사적 배경을 모르고 이념적으로 ‘하나님 어머니’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성경의 보편적 개념에 반대하여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모성애를 살며시 적용하여 하나님을 모성으로 이해하는 일이 여성신학에서 자주 일어난다.

동성애를 인권으로 간주하도록 위장술을 쓰다가 성적지향과 젠더 정체성이 마치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보편적인 인권인 것처럼 지식인을 속이는 것과 같다. 더구나 요즘 사회가 개방되면서 인권이라는 이념 아래에 동성애를 지지하면서 성경을 허무맹랑하게 퀴어(queer는 ‘괴상한’이란 뜻이다) 신학으로 풀어내는 목사들이 있다. 양성평등을 교묘하게 성 평등으로 바꾸어 동성애를 지지하는 그릇된 사회적 젠더 이데올로기는 하나님을 아버지라는 부성의 신학을 거부하는 이단적 신학이다.

2018년 9월에 이리 신광교회에서 모인 제103회 통합교단총회는 “퀴어 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은 이단이다”라고 결의를 하여, 프린스톤 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미국장로교(PCUSA)가 동성애를 받아들임으로써 치명적 교단 분열을 자초한 것과 대비되었다. 퀴어 신학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로마 병정의 창에 찔린 허리의 상처를 여성의 음부라고 십자가를 모독하는 해석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골고다에서 묵상하는 수도사

프린스톤 신학교 출신 목회자들처럼, 시대마다 조류에 편승하는 신학자나 목사는 여기저기에 너무나도 많고, 변치 않는 성서의 진리를 말씀 그대로 붙들고 나아가는 사람은 지극히 적다. 성지를 가면 그 비좁은 공간을 묵묵히 지키는 수도사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경건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친근하게 부르면서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토라를 생명처럼 소중하  게 여기며 살아간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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