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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까지 R. J. 토마스 선교사의 사역에 대한 인식 형성과정 고찰(11)

기사승인 [512호] 2021.04.08  22: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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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사 토마스 목사에 대한 이해

이은선(안양대학교 신학과 교수 및 교목실장), 사진 출처: 위키백과

Ⅳ. 오문환의 토마스 목사 관련 저술과 기념위원회 조직, 기념교회 설립(1926-1932)

 

토마스 목사 순교 기념사업을 찬조하기 위하여 각 노회에서 실행위원 1명씩을 지정하는 것을 공천부에 맡기기로 결정하였으며, 그 실행위원명단이 16회와 17회와 18회 총회에서 선정되었다. 선교사들과 다른 사람들이 더 헌금을 하여 1932년에 1860달러가 모금되었다. 새로운 건물은 1932년 9월 14일에 헌당되었는데 크기는 125×40피트였다. 21회(1932) 총회에서 9월 14일은 오후 3시까지 총회를 진행하고 그 후에는 “총회원 일동이 토마스 선교사 순교기념예배당 헌당예배에 참석하기로 가결하였다. 1915년에 더 좋은 시기가 올 것을 기대했는데 이 때 순교기념교회 건립은 1910년대 선교사들의 계획의 성취이다.

Ⅴ. 결 론

1920년대 오문환에 의한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에 대한 순교의 인식은 그의 개인적인 주장에 의한 것이 아니라 1890년대 이후 선교사들에 의해 형성된 토마

스 사역과 죽음에 대한 인식을 계승한 것이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890년대에 아펜젤러와 게일은 『코리안 리포지터리』를 통해 공식적으로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견해를 발표하였다. 아펜젤러는 슈펠트 제독의 한국과 미국과의 수교과정을 통해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설명하였다. 이 설명에서 제너럴셔먼호 발생에 대한 조선정부의 답변이 제시되었으며 토마스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게일은 목격자의 증언을 통해 제너럴셔먼호 사건에서 조선정부의 선제공격을 언급하고 백기를 흔드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은 것을 지적하며 제너럴셔먼호와 탑승자들을 변호하였다.

특히 최난헌이 이 사건의 주도자라고 언급하여 최난헌이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리고 있다. 사적인 서신에서이지만 그래함 리스가 한문성경을 반포하러 온 조선의 첫번째 개신교 선교사라고 지적하였고, 언더우드는 『조선의 부름』에서 토마스가 런던선교회 소속이자 스코틀랜드사람이었으며 그의 선교활동이 로스와 매킨타이어로 연결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1909년의 마펫 선교사의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공적인 평가는 그래함 리와 언더우드의 입장과 함께 당시까지의 선교사들의 공유된 인식을 바탕으로 특히 그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출신으로 조선에 온 첫번째 장로교 선교사로 죽을 때까지 성경을 반포하였다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공적인 평가 후에 1909년 장로교 선교부 총회에서 그와 관련된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 위원회는 1910년부터 공식 활동에서 그의 죽음을 기념하는 기념교회 건립을 추진하여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500파운드 후원을 얻기로 했으나 그 지원을 받지 못해 기념교회를 설립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그의 죽음을 기념하는 교회 설립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1909년 조선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던 감리교의 존스 선교사는 1915년에 그의 죽음을 순교라고 기술하였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평가와 인식의 토대 위에서 1920년대의 오문환의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인식, 즉 조선에 온 첫번째 장로교 선교사이자 순교자라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가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조선기독교사의 일분수령인 평양양란』이란 책을 저술하여 그의 순교를 주장하였을 때 그의 입장은 장로교총회와 장로교선교부 총회에 그대로 수용되었다. 그리고 1927년에는 기념위원회가 조직되어 1932년에 기념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오문환은 장로교선교부에서 선교사들이 그를 순교자로 인식하여 기념교회를 세우려던 사업을 실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오문환의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그 때까지 선교사들의 인식을 공유하면서 시대적인 요청을 반영하여 장로교회와 장로교 선교부와 언론을 통해 일반인들에게까지 확산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따라서 최근의 그의 죽음에 대한 재평가 과정에서 제국주의적 침략의 입장에서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것이 아니라, 초기 선교사들로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교회가 공유하였던 “성경을 전파하다 살해되어 순교”했다는 평가도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 남은 문제 : 토마스는 순교자인가 침략자인가? 모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최근에는 토마스를 순교자로 볼 수 없다거나 심지어는 침략자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은선 박사(교회사) dsglory3604@nate.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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