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1920년대까지 R. J. 토마스 선교사의 사역에 대한 인식 형성과정 고찰(9)

기사승인 [510호] 2021.03.25  16:33:02

공유
default_news_ad2

- 선교사 토마스 목사에 대한 이해

이은선(안양대 신학과 교수 및 교목실장), 위키백과

Ⅳ. 오문환의 토마스 목사 관련 저술과 기념위원회 조직, 기념교회 설립(1926-1932)

후에 상고하여 본데, 최난헌 외 3인의 서양인 중 1인은 영국 스캇틀랜드 지방에 있는 기독교장로교 목사 토마스씨인데, 씨는 1865년 스캇틀랜드 성서공회 賣書 직임으로 중국인의 풍선(風船)을 탑승하고 황해도 연안에서 漢文片福音을 반포하였고, 익년 1866년에는 倫敦연합회회원으로 종사할 시에 당시 23세이던 오문환이 이러한 명제를 설정한 것은 당시의 한국 선교사들의 인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신학도 공부하지 않았던 그가 어려서부터 마펫을 비롯한 선교사들과 교제하면서 그들을 통해 이러한 내용들을 전혀 듣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러한 인식을 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의 죽음을 순교로 서술하는 것은 거의 같은 시기 백낙준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는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규정하면서 1926년을 그의 순교 60주년으로 기념하고 그에 대해 잘못된 설명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기술한 ‘조선기독교사의 일분수령인 평양양란’이란 책자가 발표되자 그의 순교에 관한 설명은 며칠이 지나 15회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에 소개되었고, 조선예수교 장로회 선교사 공의회 회장의 요청으로 그 책자를 공의회에서 소개하면서 토마스의 순교전말을 말하게 되었다.

오문환이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규정하고 책자를 쓴 후에 그의 책의 주장들은 장로교 총회와 선교사들에게 아무런 거부감이 없이 수용되었다. 토마스 목사의 죽음을 순교로 설명하는 오문환의 책자가 장로교 총회와 선교사들의 공의회에서도 그대로 수용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이전부터 그러한 인식을 공유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장로교 목사들과 장로교 선교부의 선교사들이 그의 죽음을 전혀 순교라고 이해하지 않았는데, 신학자도 아니고 고등학교 교사인 한 평신도의 토마스의 순교에 대한 기술이 그대로 수용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전부터 한국장로교회와 선교사들이 그의 죽음을 순교로 이해했지만 그의 죽음의 전말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문환이 사람들과의 대담을 통해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문학적인 능력을 활용하여 감동적으로 그렸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대로 수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평양에서 열리는 장로교 총회와 선교부 총회에서 토마스의 순교전말을 설명했던 이때가 대영성서공회설립 30주년 민휴 총무 봉사 25주년이므로 경성교역자연합회는 그 기념식을 경영하던 중 토마스 목사는 조선예수교회의 첫 선교사일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대표로 우리나라에 온 관계상 그의 순교 제60주년 기념식도 함께 하기로 경영하였다.

그러므로 1926년 11월 14일 경성 승동교회당에서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이러한 토마스 선교사 60주년 기념식은 동아일보를 통해서도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1926년 동아일보에 10월 12일, 11월 12일, 11월 14-15일에 걸쳐 토마스에 관한 내용이 보도되었다. 11월 14일에는 “최후의 일각까지=신교전도에 정신을 바친=토마스 목사 순교 전말”이란 제목하에 4문단의 긴 기사를 실었고 11월 15일에는 “순교적 정신”이란 제목 하에서 3문단으로 토마스 순교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 글은 “인생의 고귀한 사업은 세상에 현출하는 순교적 정신을 가진 이의 손과 피로 되는 것이다. … 공자도 순교자다. … 워싱톤이나 린컨이나 무릇 인류를 위하여 고귀한 일을 한 이는 다 순교적 정신으로 산 이들이다. 이번 조선기독교회에서 기념되는 토마스 목사도 순교한 사람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시 토마사 선교사의 죽음을 순교로 이해하는 인식은 기독교계를 넘어 언론보도를 통해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60주년 기념식을 마친 후에 미국북장로교회외국선교국장으로 내한했던 스피어(Speer) 박사가 권면하자 마포삼열의 후원을 받고 평양과 전국 목회자들의 승인을 얻어 1927년 5월 7일 발기인 일동은 숭실전문학교에 회집하여 “토마스목사순교기념회” 창립총회를 하였다. 기념회의 회장은 마펫 선교사였고 오문환은 총무를 맡았다.

순교기념회는 몇 가지 사업을 설정하였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사업은 ‘토마스선교사전기’ 출간이었다. 그는 1926년부터 2년에 걸쳐 토마스 목사의 순교지와 묘지를 답사하였고 당시 토마스 목사에게서 성경을 받았던 인물들과 목격자들200여명을 면담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이은선 박사(교회사) dsglory3604@nate.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독자기고

item34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