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 강점기 한국 최초 음악선교사 마두원
복음은 전해졌으나 한국교회가 출발이 되고 안정적으로 정착되지 못했던 당시 매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부흥의 불길이 불타올랐던 일제 강점기에 내한하여 한국 최초 음악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에 다양한 모습으로 선교에 이바지한 이를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바로 그가 마두원(馬斗元, Dwight R. Malsbary)선교사이다. 마 선교사는 1899년 5월 22일 미국 캘리포니아 스타 커튼에서 출생했으며, 1920년 캘리포니아주 프레스노초급대학을 마치고 1924년 시카고 셔우드 음악대학교를 졸업한 후 1929년 미국 북장로교의 교육(음악)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1936년에 일본은 우리나라 국민과 외국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하게 요구했다. 일제의 칼날이 시퍼렇게 물들었던 무렵 마두원 선교사는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평양 외국인학교에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다. 그러나 그는 신앙적으로 실망하지 않고 학생들과 함께 하나님께 철저히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 무렵에 함께 그와 했던 학생들이 고 방지일 목사, 고 박윤선 목사와 같은 신실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해방 후에는 목사의 신분으로 1948년에 돌아온 마두원 선교사는 고려신학교(현 고신대학교)에서 강의하였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방송 전도와 음악교육을 진취적으로 병행하면서 선교사역에 매진하였다.
이처럼 일제시대부터 대한민국의 음악과 한국교회 음악발달에 지대하게 공헌했던 마두원 박사의 삶과 선교사역을 생각해 보는 것은 21세기 한국교회와 지금의 사회적으로 어려운 때에 참 의미가 있다고 사료된다. 또한 그분의 고귀한 삶들을 본받아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지금도 해외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귀한 선교사들의 노고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지속해서 한국교회가 복음을 열방에 전해야 하는 동기가 될 것을 기대하면서 그의 사역들에 대하여 조명해 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
마두원 박사가 가르쳤던 인물 중에는 대한민국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를 비롯해 ‘가고 싶어’의 김동진, ‘고향생각’의 현제명,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박태준 교수, 오페라가수 채리숙, 피아니스트 한동일, 백건우, 김애자 등이 있다. 이처럼 우리의 기억 속에 잘 알고 있는 이들이 마두원 선교사의 애제자들이다.
한국교회사적으로 마두원 선교사가 남겼던 선교사역의 열매 일부는 강원도 홍천군 일대에 무려 27개의 교회를 설립하여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더 열악한 환경인 강원도 홍천에서 사역을 펼쳤다는 것은 그의 영혼 사랑이 남달리 뜨거웠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한국인을 위해 홍천읍과 도촌면, 속초시에 제이드(Jade)병원도 3개 설립하여 낙후된 강원도 의료선교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를 기억하면서 후대에 역사에 남기도록 ‘음악선교사 마두원 기념 음반’을 펴낸 피아니스트 김애자가 있다. 영창악기 설립자 김재창 대표의 딸로 그녀는 마두원 선교사에게 피아노를 직접 배웠다. 그녀는 “반세기가 더 지난 지금 그의 음악을 소리로 남기지 않으면 귀중한 유산이 잊혀질 것 같다는 긴박감 때문에 음반을 냈다”라고 말했다. 마 선교사의 찬송 피아노 편곡집을 재해석하고 연주앨범을 펴낸 것이다.
그녀는 명문 비엔나 국립음대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석사, 텍사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국내와 카네기홀, 러시아 모스크바 집회에서 소명을 받고 찬양사역자로 한국과 미국에서 활발한 음악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인물이다.
또한 마두원 선교사가 한국교회사에서 역량을 끼친 것 중의 하나는 1961년에 대한신한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김치선 박사와 함께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 교단을 공동으로 창립하고 현재의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교단으로 발전시킨 사실이다.
이처럼 위에서 언급한 것 같이 마두원 선교사는 일제 강점기 심히 고난의 세월을 걷고 있었던 1929년에 한국인을 위해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삶을 위해 이름도 빛도 없이 살았으며, 특별히 영혼을 구원하려는 목적을 갖고 의료 기관을 설립하고 한국음악, 교회음악의 발전을 위해 전문 음악인을 양성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안타깝게도 선교 현장을 방문하던 1977년 7월 30일, 78세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목숨을 거둘 때까지 전 생애를 한국을 위해 헌신하고 이 땅에서의 사명을 다하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1977년 8월 5일 파주시 기독교 일산 공원묘지에 안장하고 있었던 마두원 선교사의 묘를 2018년 8월 27일에 김광섭 원로목사와 그에게 배웠던 수많은 제자들이 홍천 희망교회 희망동산으로 이장하면서 허필홍 군수, 김재근 군의장, 허남진 군의원, 많은 교인들도 동행하면서 특히 허 군수는 “마두원 선교사의 헌신적인 삶은 홍천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고 하였다. 아울러 그의 숭고한 뜻과 정신을 재조명하면서 매년 추모의 행사를 하고 있다.
마두원 박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중 미국에서 교육선교사로 일제 강점기에 내한하여 학교와 병원 그리고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는 김치선 박사와 함께 공동으로 ‘대신교단’을 창립하였고, 특별히 올해는 대신교단 60주년을 맞으며 영적 의미가 있는 한국교회사에 역사의 흔적을 남겼다. 여전히 그의 선교의 열매는 지금도 물이 흐르듯 후대를 통하여 전국과 해외에서 아름다운 영혼 구원의 꽃을 피우고 있다.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지 사명이 있다. 힘들고 어려운 코로나19의 시련 속에서 대한민국 국민들과 한국교회 기독교인들은 마두원 선교사의 발자취를 반드시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개인과 가정, 교회, 사회, 국가에 어떠한 시련과 고통이 나의 삶의 현장에 도래한다고 하여도 절대 실망하지 말고 마두원 박사가 걸어갔던 발자취를 반추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복지대학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