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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사모의 편지(63)

기사승인 [506호] 2021.02.17  15:5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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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멘토 모리

          위 영 (본지논설위원,'속삭이는 그림들' 저자)

어쩌면 도시에 사는 우리, 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제 대문은 없습니다. 야트막한 담이 단정하고 고운 옷이라면 대문은 그 옷에 마지막으로 달아놓은 단추 같은 것인데....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하는 세상의 문인데 말이지요. 대문을 열고 바깥세상의 자신을 뒤돌아보고 나오면서 집에서의 자신을 뒤돌아보는 그런 틈이 없는 기이한 세상이라고나 할까요.   


 아주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에는 대나무로 만든 대문이 있었어요. 굵은 대나무를 통째로 엮거나 가느다란 대나무는 잎까지 넣어서 만들었어요. 자그마한 대나무 잎들이 새끼에 꽁꽁 묶인 채로 대문이 되어 있으면 어린 내 눈에도 그 이파리들이 달리 보이곤 했었어요. 처음엔 초록잎 이다가 차츰 누렇게 바래가곤 하던... 그 동네는 대나무가 흔했어요. 자생력이 강해서이기도 했겠지만 추운 겨울에도 푸르르고 싶은 사람들의 열망 탓이었을까요. (사실 이렇게 겨울의 끝자락에 서면 초록이 고파서 허기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골목 끄트머리께 있던 가느다란 대나무로 엮은 대문에 등이 달려 있었어요. 검은 글씨 두 자가 쓰여 있는, 물론 어려서 조등이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지요. 그런데도 그 알 수 없는 음울한 빛의 정체가 내심 의심스러웠어요. 아마 어린 내가 처음으로 의식한 죽음의 빛이 아니었을까, 며칠 전 길을 가다가 백씨네 상가라는 표지판이 있었고 골목으로 들어서니 근조라고 적혀있는 대문이 있더군요. 낡은 집 대문에 매달려 있는 겨울빛 같은 근조 등을 보며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조등을 떠올렸어요. 

 죽음의 여의사라고 불렸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책을 보지 않더라도 사람의 생명이 숨이 멈춰짐과 동시에 소멸의 길을 걷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는 즉시 기능을 잃을지라도 그 집을 마음대로 부리며 살았던 그 미묘한 존재,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은, 그러나 육체를 살아있게 했던 그 매우 정신적인 존재인 영혼은 분리되는 그 순간을 차분히 응시할 것 같기도 해요. 고요하면서 적막한 시간이겠지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사랑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다면 쓸쓸함이 조금 적을까요. 이별의 쓰라림이 왜 없겠어요. 다시는 만지고 말하고 얼굴을 대할 수 없는데요. 눈이라도 펑펑 내리면 마음이 좀 나아질까요. 특히 이즈음처럼 겨울이라면 말이지요. 인사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이제는 흙으로 되돌아갈 자신의 몸을 한참 들여다보며 내 몸도 안녕, 네 덕분에 잘 지냈어. 너무 고요한 인사라 아무도 못 들을지도 모릅니다. 오래 살았던 집이라면 여기저기 바라보지 않겠어요. 방이랄지, 가구랄지, 거실의 소파랄지, 그런 아주 짧은 순간ㅡ135억년 전 별빛을 찾을 수 있는 제임스 웹 망원경이 우주로 간다면서요, 그러니 순간의 시간이나 영원을 우리가 어찌 알 수 있겠어요ㅡ이 지나면 누군가 부르는 곳으로 뒤돌아서서 떠날 겁니다. 잠시 후면 자기 죽음을 알리는 조등 하나 쓸쓸하게 밝혀 있을 대문을 지나서요.   
 수많은 죽음을 보면서 삶의 의미를 헤아렸던 호스피스 운동가이자 철학자인 로즈선생이 말한 죽음 전에  해야 할 일들은 아주 사소한 거였어요. <많은 사람들이 바다 가까이 살지만 바다를 볼 시간이 없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한 번만 더 별을 보고 싶다고 바다를 보고 싶다고 말한다. 아침의 냄새를 맡아본 것은? 파란 하늘을 본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번 만 더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지금 그들을 보러 가라> 관계에 대한 말이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우리 선생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하구요. 
 이제 설이 지나고 진짜 새해가 되었는데 어둡게 무슨 조등 이야기냐구요?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 놀라운 섭리이자 공평함이죠. 그러니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벗처럼 여기는, 아주 잘 사는 방법인 거죠. “어느 날엔가 배우게 되리, 영혼으로 얻은 그 무엇도 죽음이 훔치지 못하다는 것을” 타골의 시입니다. 이제 설이 지났습니다. 죽음이 우리 모두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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