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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교 정체성의 뿌리를 찾아서(18)

기사승인 [504호] 2021.01.20  15:3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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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성결교회 창립자 김상준의 생애와 사상

정상운 박사(교회사)

본지논설위원, 전 성결대 총장, 교수

Ⅰ. 김상준의 생애

김상준에게 동경성서학원에서 성서신학을 가르친 나끼다 쥬지(中田重治)

“先生은 禮儀를 尊崇하는 가문에서 出生하섯음으로 그 禮儀를 嚴守하다가 一朝에 예수를 믿으시고 先祖의 奉祭祀를 廢하시매 嚴親에게 叱責과 鞭達을 無數히 당하섯고 온 門中이 問會를 열고 嚴責 恐喝하얏으나 如一히 信仰의 道를 직히심으로 乃終에는 그 嚴親께서 不孝의 子息이라 하야 獨子이지만 죽이려고 하실 때에 사람을 죽이듯 할 수 없다 하야 개 죽이듯 하랴고까지 하심으로 (멍석말이를 하랴 하얏음) 屢次 죽을 번 하얏으나 조금도 控折을 當치 않으시고 도로혀 信仰에 鍛鍊함을 받을 뿐이로서 ....”

죽을 고비에서 풀려나온 김상준은 바로 일본으로 가는 배에 올라 타고 일본 유학을 떠났다. 어렵게 일본에 도착한 후 김상준은 정빈(鄭彬)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하루는 정빈과 같이 카우만(C. E. Cowman) 선교사와 니까다 쥬우지(中田重治)가 세운 동경 요바다시(消橋)가시와기(柏木町)에 있는 동경성서학원(東京聖書學院, Tokyo Bible Training Institute)을 방문하였다. 김상준과 정빈은 킬보른(E. A. Kilbourne) 등 그곳 교수들의 배려(配慮)로 일본어에 익숙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성서학원 학생으로서 입학이 허락되었다.

1905년 동경성서학원에 입학한 김상준은 정빈과 함께 50여명의 그곳 학생들과 같이 열심히 공부하였다. 처음에는 일본어에 익숙치 않아 공부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얼마나 배우는 데 열심을 다하였는지 일상 회화뿐 아니라 강의도 곧 수월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레티 카우만(Lettie B. Cowman)은 『활천』(1권 7호)에서 그들의 유학 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들은 저가 他行한 동안에 東京聖書學院에 入學하였던 것이다. 저들은 이 곳에서 進擊的으로 福音을 傳播하기 爲하야 修養시킨다는 消息을 드른 것이다. 그들의 姓名은 朝鮮서 一般的으로 많은 姓 金, 李, 鄭 등이엿다. 저들은 日本語를 잘 모르나 學生으로 許可하였다. 저들은 얼마나 日本語를 열심으로 工夫하였던지 얼마 못되어 講義를 드를 만큼 되었다. 三年을 經過하야 저들의 修養 期限은 마치고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學校를 저들의 나라에도 設立하실 것을 믿고 歸國하였다. 저들은 그것이 事實化되기를 祈禱하면서 갓다.”

김상준은 동경성서학원에서 수학한지 얼마 되지 않을 때 세번째 한국인 성서학원 유학생인 이장하(李章夏)를 만났다. 초기 한국성결교회의 트리오(Trio)인 정빈(鄭彬), 김상준(金相濬), 이장하(李章夏) 세 사람은 받은 바 사명을 위해 공부하고 함께 기도하면서, 장차 조국으로 돌아가 새로운 선교의 장을 개척하고자 하는 모국선교의 꿈(vision)을 키워 갔다.

김상준의 유학 시절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통해 일제에 의해 주권이 사실상 빼앗기고, 침략의 마각이 여실히 노출된 울분(鬱憤)과 참담(慘憺)의 시기였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로 신문물을 수용하기 위해 유학한 초기 일본 유학생들은 자연히 그들 스스로의 조직과 일종의 민족적 사명감에서 하나의 집단적 활동체를 필요로 하였다. 이에 일본에서 조직된 최초의 일본 유학생 단체가 '대조선인 일본 유학생 친목회' 였다. 그러나 이 단체는 곧 해체되고, '제국청년회(帝國靑年會)‘가 새로 조직되었는데, 이것도 다시 얼마 안 가서 해체되었다.

이후에 약간의 공백기 뒤에 지연(地緣)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학파로 분파되면서 다시 유학생 조직이 결성되었는데, 그 중의 한 단체로 1905년 겨울경에 조직된 것이 ‘태극학회(太極學會)’이었다. 이 태극학회는 주로 관서 지방(關西地方)의 유학생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학회는 일본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유학생들의 일어 학습을 돕는 것이 발단이 되어 유학생들의 친목(親睦)과 학술 연구(學術硏究)에 목적을 두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창립 의도와는 단리 사실상 그 이면에는 민족주의 의식의 확립과 철저한 국가관념 속에 외침(外侵)으로부터 무너지는 위태로운 조국 현실을 직시하고, 구원, 해결코자 하는 데 그 본래의 목적을 두고 있었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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