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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사모의 편지(56)

기사승인 [499호] 2020.11.25  14: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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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

위 영  (본지 논설위원'속삭이는 그림들' 저자)
애월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두세 번 멈췄다. 수많은 크고 작은 저만의 형체를 지닌 괴이한 돌들이 무리 지어 손짓했기 때문이다. 사실 가까이 가보면 검은 돌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물이 묻지 않은 돌들은 회색이었고 환한 햇살을 받으면 더 환했다. 그러니 돌이 빚어내는 채색 없는 음영들의 수묵화라고나 해야 할까, 하지만 저 강렬한 힘과 완강한 자태를 캔버스로 밀어 넣을 수나 있을까, 수많은 세월이 함께 만들어낸, 세월 만이랴, 바람이 나서겠지, 푸르른 저 바닷물도 가만있을까, 햇살은 어떻고....그러니 내 앞의 풍경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풍경은 홀로 풍경이 되지 않는다. 풍경은 조화로움이고 순리이자 정연한 논리이다. 풍경은 무엇보다 바라보는 자와의 소통이다. 그러니 풍경은 일종의 길이다.

  며칠 전 신문에서 벽면녹화를 하는 어느 젊은이의 기사를 읽었다. 보육원 출신인 그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 회사와 가정을 일궈 가는 모습도 좋았지만, 특별히 식물에서 터득한 <자립自立>에 대한 생각이 놀라웠다. 그가 하는 일은 벽을 식물로 꾸미는 일이라서 식물관찰을 자주 할 수밖에 없었는데 혼자 크는 것 같은 나무도 결국 땅에, 물에, 바람에 기대서 살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그에게 자립은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생기고,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자립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다. 그의 자립 속에 풍경을 넣었다가 사람을 넣어보기도 했다. 아주 잘 어울린다.   

 바닷가 윤슬은 한도 없이 이어진다. 끝없이 소생되는 빛과 물의 조화로움,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그 눈부심은 매혹의 향연이다. 애월 해안도로를 지나 월령리에 들어선다. 애월의 월과 월령리의 월은 둘 다 달 月자다. 애월의 월자는 달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땅(land)을 뜻하는 말로 달 tar을 빌려 쓴 한자라고 이해한 사람이 있다. 약간 높은 땅을 달/tar이라고 그래서 달동네... 월령리는 달처럼 둥글게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 월령리 자생 선인장 군락지는 천연기념물이다. 저 혼자 거기서 나서 자라고 죽고 다시 그 후손들이 나서 자라서 죽고 자연이 키운 혹은 스스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만만한 자생종. 척박한 돌 틈에서도 생명을 이어가는 것은 태생이 사막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멕시코가 고향인 선인장은 쿠로시오의 난류를 타고 와서 제주 월령리에 터를 잡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생각해볼수록 대견하다. 얼마나 먼 여행을 했고 얼마나 많은 질고를 거쳤을 것이며 겪어 낸 인내는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가시처럼 보이는 것이 선인장의 잎이고 손바닥만 한 몸은 줄기다. 먹을 것 없는 사막에서 살다 보니 저리 가시로 이파리를 삼아 자신을 보호했을 것이다. 자세히 보니 새것은 푸르고 여리며 새침하다. 오래 산 것은 늙은 사람처럼 흐무러져 있다. 그래도 열매는 새것에 달리지 않는다고 한다. 새것은 저 살기도 바쁘겠지. 오래 산 것은 그 살아온 것 만큼 너그러울 것이고 그래서 열매에게 곁을 줄 것이다. 

 김영갑의 갤러리 두모악에 가면 거의가 다 제주의 오름 사진이다. 두모악은 한라산의 옛이름이고 오름은 산의 제주도어다. 제주도의 오름은 한라산의 기생화산으로 자그마한 제주의 산 모두가 오름이다. 무려 368개라고 한다. 당오름에 오르니 발걸음 몇 번에 사위가 훤하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겨우 몇 번의 경험이라) 제주의 오름에 서면 그곳이 어디든 절경이다. 자연은 생각이나 철학, 의미나 가치를 떠난 더 큰 어떤 감정이다. 섭리의 손길일지, 침묵하게 하는 숭고, 괴테의 여성이기도 하다. 자연은 모든 예술의 근원이자 기착점이기도 해서 아름다운 풍경은 사람을 사무치게 하는 걸까,
 전망대에 망원경이 있어 차귀도 쪽을 바라보았더니 개미보다 더 작은 모습으로 사람들이 걷고 있다. 차귀도와 와도가 푸르른 바다에 더 짙푸른 모습으로 엎드려져 있는데 마치 그 모습이 먼바다를 향해 절을 하는 듯 겸손해 보인다. 사람의 손이 타지 않는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그분의 손짓으로 여겨진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두 권의 책, 한 권은 성경이고 또 한 권은 자연이라는, 존 스토트목사의 말이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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