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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교 정체성의 뿌리를 찾아서(13)

기사승인 [499호] 2020.11.25  14: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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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빈 편 - 한국성결교회 창립자 정빈의 생애와 사상

 

정상운 박사 (교회사)

본지 논설위원전 성결대총장, 교수

Ⅲ. 정빈의 사상
 2. 복음 전도(Evangelization) 우선주의
 아쉽게도 정빈은 한국성결교회의 주도적인 자생적 개척이라는 큰 공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성결교회에 남아 지키지 못했다는 비판적 지적을 후학들로부터 받고 있다. 김상준 목사도 이 일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였다.
 정빈은 1914년 9월 30일에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김상준과 서로 간의 의견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고, 킬보른 총리의 중재와 김상준의 용서를 구함에도 불구하고 칠판에 12개 조문을 기록한 채 성결교회를 떠나 만주의 대한기독교회(현 침례교)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 후 1917년 다시 돌아와서 안성교회(1917년)를 창립하고, 1919년에 다시 인천교회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1921년 재차 성결교회를 사직하고 북간도로 넘어가 대한 기독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정빈이 성결교회를 재차 떠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처음 창립 때 성결교 땅에 개간하고 심은 그 개척의 각별한 애정마저도 버리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 일은 우리에게 궁금증과 함께 아쉬움을 가져다준다. 정빈과 김상준이 불화를 일으킨 사건은 12개 조문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으나 이것이 사료를 통한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상황과 정빈 의 분명한 사상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1914년과 1921년 이 두 해에 초기 성결교회에서 행해졌던 일과 정빈의 성결교회를 떠난 사건이 서로 맞물려져 있는 사건임을 알 수 있다.
 1914년 4월 22일에는 한국성결교회에서 최초로 1907년부터 염곡, 무교정 복음전도관에서 함께 사역했던 부임자(副任者) 김상준이 이장하, 강태온, 이명직, 이명헌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다. 당연히 초기 목사 대상자 명단에 들어가 있어야 할 무교정 복음전도관의 주임자(主任者) 정빈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 1914년에 이어서 두 번째 떠난 해인 1921년은 1907년부터 사용했던 복음전도관이라는 명칭을 버리고 기성교단(旣成敎團)의 조직과 같이 동양선교회 조선예수교 성결교회로 경화되어 가는 바로 그 해였다. 따라서 우리는 1914년, 1921년 이 두 해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을 도출해 낼 수 있다. 그것은 이 두 해가 성결교회(복전도관)도 기성 교회와 같이 목사라는 정식 제도와 교단 조직을 가진 기성교단으로의 전환, 즉 제도화된 전통 교회의 성격을 지니게 되는 해였는데, 이것에 대해 정빈은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처음 성결교회를 떠난 정빈은 1914년부터 1917년까지, 그리고 1921년 이후 동아기독교로 재차 옮겨 많은 교회를 개척하였고, 당시 펜윅(M. Fenwick)에 이어 동아기독교의 한국인 최초 지도자였던 이종덕 감목과 치밀한 교분을 쌓으며 함께 사역했다. 그는 이종덕 감목이 시무하였던 만주 종성동 교회의 성경학원 교사가 되었는데, 그 때도 처음 떠날 때 목사직이 아닌 감로(監老)의 직분과 다를 바가 없는 평신도급의 지도자로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정빈이 성결교회를 떠나게 된 원인 중의 하나는 일본에서 공부할 때 자신에게 가르침을 준 사사오 목사의 영향에서 받은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사사오 목사는 1911년 일본 성교단(日本聖敎團) 사건 이후 나카다 쥬우지가 일본의 토착교회 설립에 박차를 가했으나 사사오 목사는 1913년 4월 동양선교회가 교단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이것이 동양선교회 초기의 근본 취지로부터 이탈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실제로 이러한 일이 진행될 때 사사오 목사는 동양선교회 및 성서학원 교수직을 사임하고 일본 각지로 순회 전도자로 떠났고, 1914년 12월 30일 과로로 인해 46세의 젊은 나이로 소천하였다.

 사사오는 회심자를 얻거나 이들을 모아 특정한 지역에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가 아니었다.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두고 오로지 복음만을 직접 불신자에게 전파하는 것이 생의 주요 목표였다. 이 같은 양상은 19세기 말에 일어났던 신앙 선교회의 특징이 반영된 형태의 것이었다.
 특별히 사사오 목사는 1890년부터 영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성결운동을 일으키며 선교 사역을 행하였던 벅스톤(Barclay Fowell Buxton)의 제자로서 특정한 한 지역에 선교 활동의 범위를 제한시키는 것을 지양한 그의 영향을 크게 받기도 하였다. 또한 이것은 동양선교회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만국성결연맹 및 기도 동맹’(1897년)이 교파적인 교권 형성을 반대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교회, 즉 새로운 신약성서의 교회에 대한 표방의 반영이기도 하였다.
 정빈은 동경성서학원 수학 당시 존경하고 따랐던 동양선교회 초대 부총재였던 사사오와 마찬가지로 계급 사회적인 성직 제도나 이것이 더 구체적인 가시적 조직으로 드러난 기성교단 형성에는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정빈의 스승이었던 사사오 목사가 일본 성교단을 떠나 복음전도를 하다가 죽은 일이 정빈의 사역지 변경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은 무관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1914년과 1921년에 19세기 신앙 선교단체와 비슷한 초기 복음전도관의 특징을 갖고 있었던 동아기독교로의 전향(轉向)은 정빈이 당시에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으로 나타났다.
 
3. 구습(舊習)에 대한 개화사상
 기독교는 19세기 초인 1832년 칼 귀츨라프(Karl Gutzlaff)부터 대동강의 토마스 선교사에 이어서 알렌, 그리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20세기 초엽까지 서세 동점의 역사와 더불어 한국에 전파되었다. 안으로 정치, 경제, 사회의 여러 분야에 있어서 아직 외세(外勢)를 맞이할 준비가 공고히 이루어지지 못했던 이 나라는 이 때 자주화와 개화를 동시에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물밀듯이 들어오는 외세를 적절히 통제하여 자기 체질화시키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외래문화의 수용을 통한 개화와 함께 주체성이 강조되었다. 따라서 이 땅에서는 기독교의 전래와 함께 개화(開化)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사료의 한계로 정빈의 구체적인 개화 의지를 살펴볼 수는 없지만 정빈은 개화의 한 방편으로서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또한 당시 한국 사회의 구습에 젖어 생성된 한국교회의 의식 구조와 비합리적인 생활에 대하여 자신의 개화 의지를 「그리스도신문」을 통해 고국의 성도들에게 펼쳐 보였다.                                              (다음호에 계속)

 
정빈을 가르친 동경성서학원 원장인 사사오 목사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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