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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영(白信永)전도사, 성결교단 여전도회 창설 

기사승인 [498호] 2020.11.13  15: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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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정신의 여성교육운동가, 신길교회 개척

1. 출생과 신앙

백신영은 1889년 경남 밀양에서 백씨 가문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16세에 결혼했으나, 20세에 남편과 사별하고 청상과부가 되어 낙심 중에 나날을 지내던 중 어느 주일날 동네에 있는 교회에 출석하며 인생의 새로운 희망을 찾게 된다. 
1910년 조선왕조가 멸망한 직후 농촌여성 계몽운동을 위해 밀양에 찾아온 김규식 박사의 부인 김순애 여사를 교회에서 만나게 되고, 그분을 통해 여성도 글을 배우면 영광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따라서 서울에 올라가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도 하고 성경도 배우개 된다. 
그녀는 공부를 하면서 예배드리는 일에 열심을 냈다. 그러면서 간절한 소원을 고백하며 기도하게 되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소원’했고, 둘째는 ‘조국의 앞날을 위하여 헌신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914년 초에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2. 전도자로서 변신

그녀는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누구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1914년 4월 서대문에 있는 동양선교회소속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했다. 속으로는 하나님나라의 일꾼이라는  자부심으로 남다르게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며 노력했으며, 여성 지도자로 나서기 위해 착실히 준비를 해 나갔다. 
1917년에 3년의 학업과정을 마치고 경성성서학원 제6회 졸업생으로 졸업과 동시에 개성 복음전도관에 전도부인으로 파송을 받아 한글교육, 절제운동, 금주와 금연운동을 전개하면서 죽을지 살지를 분별하지 않고 열심히 사역을 감당했다. 

3. 애국 여성운동에 참여

그러던 중 1919년 정신여학교 교사로 청빙을 받아 교편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해 3월 대한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났다. 이에 당시 여성단체대표 16명이 10월 17일 정신여학교 천미례 부 교장 사택에서 비밀리 모여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전달된 통보에 의해 여성단체를 하나로 통합하여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임원을 선출하였는데, 여기서 백신영 선생이 결사부장으로 선출된다.
이때 선출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임원은 회장 김마리아, 부회장 이혜경, 총무 황에스더, 그리고 결사부장 백신영이 선출되어 애국부인회 회원을 모집하였다. 임원들의  열심으로 한 달 만에 회원 2천 명이 되자 하와이에 있던 애국부인회가 자금 2천원을 보내오게 되었고, 이중 1천원은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게 된다.

4. 고난과 역경을 신앙으로 극복

그러나 그해 11월 28일 동료교사 중 한명인 오 선생이 배신해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밀고를 하게되고, 임원들을 포함한 42명이 한꺼번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모두다 대구 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이때 백신영도 함께 수감된다.
백신영 전도사는 경찰의 신문 끝에 회장 김마리아와 같이 주동자로 지목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가운데 가진 문초에 시달려 중병을 얻게 되었고, 1920년 6월 7일 세브란스병원 간호사들이 들것으로 부축하여 대구법정에 출석하면서 법정에 나타나 재판을 받았다. 이때 재판장에서 검찰이 3년 구형을 했으나, 판사가 징역 1년형을 언도하고, 병이 심하여 병보석으로 출감하게 된다.
백신영 전도사는 옥중에서 중병으로 신음하면서도 날마다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하면서 남은 여생을 하나님께 부탁했다. 병보석으로 출옥한 후 그녀는 몸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1922년에 강경교회 전도부인으로 부임하여 1927년까지 시무하면서 가는 곳마다 부인회조직과 교회봉사, 전도에 힘써 부흥을 주도했다.

5. 다시 복음전도자로 후학 육성의길

1924년에는 강경보통 공립학교 학생들이 강경뒷산 언덕에 세워진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거부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강경성결교회에 출석하는 윤판석 총각집사와 훈도선생 김복희 그리고 그 반 학생들이 시작하였고, 결과적으로 학교에서 김복희 선생은 사면되었으며, 학생 7명은 퇴학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교회에서 백신영 전도사가 우상숭배 거절과 애국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신영 전도사는 그 후에 강릉교회, 서울 체부동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며, 교육적인 측면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양육하고, 교회부흥에 힘쓰게 되었는데, 이 소식이 알려지자 1933년에 경성성서학원에서 요청이 있어 여자기숙사 사감으로 부임하게 되어 이곳에서 10년간이나 후학양성에 심혈을 쏟아 영적성장에 힘쓰게 된다. 
이후 1934년 9월 29일 경성성서학원 이사회의 허락을 받아 학원 강당에서 ‘한국부인연합회’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초대회장에 선임된다. 
그녀는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세 가지 사업을 전개하였는데 첫째는 여성기관지‘기쁜 소식’을 매월 발행하여 여성들의 교양과 신앙, 결혼과 가정관리, 미신타파와 자녀교육 등을 깨우쳐주는 역할을 했다. 둘째는 매년 ‘부인연합회수양회’를 개최하여 전국에서 모이는 약 900여명을 한 곳에 모이게 하여 은혜 받고, 지 교회부흥의 원동력이 되게 했다. 셋째는 만주 심양교회가 예배당건물이 없기에 헌금을 모금하여 당시 235원을 보내서 대지를 매입하고 교회를 건축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그녀는 일을 계획하면 차분히 완성시켰으며, 한국여성운동과 교단의 교회부흥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6. 미래를 향한 기독교 사역

그녀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여전도회 창립과, 한국 YWCA 창설 멤버로서 교사 겸 종교부장을 역임하고, 대한적십자사 봉사부장 등을 맡아서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시기에 굳건한 신앙심으로 한국여성운동에 앞장서 일하면서 여성들에게 희망과 소망을 주었으며, 문화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끼쳐 한국여성들의 스승역할을 했다.
1943년 성결교단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해산되고, 시골로 내려가서 정양 중에 해방이 되고 새로운 각오로 복음과 구원사역에 임하던 중 체부동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여 일하게 되었다. 

7. 영등포 신길교회 개척

1946년 4월 영등포 신길동에 사는 경서성서학원에서 동문수학한 인연이 있는 전지숙씨의 딸 이순희 집사를 심방하고, 그의 자택 2층에서 주변사람들을 전도하여 예배드리기 시작하면서, 채부동교회의 도움을 받아 신길교회를 개척하여 김 진 집사를 최초 심방집사로 임명하여 교회를 돌보게 했다.    

백신영 전도사는 1950년 6.25 사변이 터지고, 몸에 위암이 퍼져서 결국은 1950년 9월 22일 향년 만61세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하문수 대표기자 cherald@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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