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빈편-한국성결교회 창립자 정빈의 생애와 사상
정상운 박사(교회사)본지논설위원전 성결대 총장, 교수 |
Ⅲ. 정빈의 사상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성결교회는 1907년 5월 30일 정빈과 김상준에 의한 주도적인 자생적 개척을 통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성결교회 창립자 2인 중의 한 사람인 김상준과는 달리 정빈에 대해서는 창립 80년이 지나도록 단 한 편의 글도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정빈 사상의 연구에 대한 시도는 전무하다는 말을 할 정도로 거의 황무지와 같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한국 성결교 창립자 정빈의 생애에 대한 언급조차도 없었던 것이 한국성결교회의 역사연구의 현실이었고, 1987년에야 비로소 필자의 정빈론을 통해 처음으로 지상에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박명수 교수는 정빈 연구에 대해 <들소리 신문>(1996.9.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상운 교수는 수 년 전부터 성결교회의 자료를 발굴하기 위하여 노력하여 왔다. 특별히 그는 성결교회 최초의 전도자인 정빈에 관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여 초기성결교회의 연구에 큰 공헌을 하였다. 지금까지 성결교회의 자료가 『활천』을 중심으로 맴돌았는데 그는 그 지평을 일반 교계 신문과 일반 문헌에까지 확대하여 성결교회 역사 연구의 폭을 넓혔다.”
이 글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그 동안 창립자 정빈이 가졌던 사상의 윤곽조차도 그려낼 수 없었던 것이 성결교회의 과거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사료의 한계(사료의 귀중성 인식 부족과 이로 인한 보관 및 발굴에 대한 소극성)와 한국교회사에서 성결교회만이 가진 타교회(교단)와 다른 독특한 특성인 성결교회성에 대한 역사의식의 빈곤에서 연유되었음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1987년 창립 80주년 이전에는 성결교회를 이 땅에 심고 거름을 준 정빈에 대해서는 앞에서 지금까지 쓰여진 단편적인 글들을 통하여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게 굴절된 시각으로 보여지거나 빈 공백으로 밖에 보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동안 이것은 성결의 후학들에게 실증사적인 분석과 비판 없이 잘못 받아들여져야 했다:
“당시 북간도에는 많은 애국 독립 운동가와 그 가족이 몰려와 살았는데 정빈 씨는 그곳에 가서 자유롭게 전도하는 한편 독립 운동에 투신하고 싶은 충동을 받고 떠났다고 한다”.
이것은 서울신학대학교수 교수논문집 『神學과 宣敎」 제7집,(1981)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반복되고 있다:
“정빈 : 정확한 자료는 없고 황해도 해주 출생, 개화사상의 영향받아 기독교 입교,
1905년 성서 학원, 1907년 귀국, 1912년 성서 학원 교수로 봉직하였다. 의견 충돌로
1914년 사임, 북간도 구령 사업에 종사, 후설에 의하면 독립운동 하였다 함.“
이와 같은 내용의 글은 정빈이 성결교를 떠나 자유 전도뿐만 아니라 독립 운동에 투신했다는 암시를 주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이다. 따라서 정빈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필자의 논문이 발표되기 전까지는 위의 내용으로 만족해야만 했고, 이것은 통설에 가까운 내용으로 후학들에게 받아들여져야만 했다. 한국성결교회의 정체성 규명과 미래적 방향 설정에 다소나마 유익을 줄 것으로 사료되어 그의 사상을 다음과 같이 3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순복음이라 불리운 사중복음의 강조
정빈은 한말 일제에 의해 한민족의 주체성이 점점 상실되어 가는 불운한 역사적 정황 앞에서 당시의 민족적 과제였던 개화와 민중의 요망인 반봉건적 의식 개혁과 사회 개혁을 선교의 과제로 삼기에 앞서서 이 민족 구원의 첩경을 기독교의 수용에서 찾았다. 그래서 구국(救國)은 정빈에게 있어서는 곧 ‘복음 수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일본이라는 새 침략 세력 앞에서 반일적 감정과 민족 의식을 형성하고자 하는 대중적인 정치 운동(자주 독립 사상과 충군 애국적인 신앙 고백 등)을 통해 이 민족의 구원과 자유의 길을 모색하지 않았다. 그는 한말이라는 역사적인 상황과 현실에 타협하여 복음이 자기 본질을 상실하고 변질됨으로써 기독교가 민족 구원의 혼합 종교로 전락됨을 방지하고자 노력하였다.
뒷줄 왼쪽이 김상준, 앞줄 가운데가 정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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