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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성결교 정체성의 뿌리를 찾아서(3)

기사승인 [489호] 2020.08.06  11: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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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성결교회 창립자 정빈의 생애와 사상

정상운 박사

(교회사)본지논설위원, 성결대5-6대 총장,성결대 교수

II. 정빈의 생애
2. 동경성서학원과 일본에서의 활동
곧 두 사람은 동경성서학원의 교수, 학생들(중국인 학생 1인)과 한 가족이 되어 신학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정빈은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일본 말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고, 얼마 안 가서 그는 일본 말을 말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레티 카우만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들은 일본에서 전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학생들을 훈련시킨다는 동경성서학원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그들의 이름은 한국에서 잘 알려진 이, 김, 그리고 정씨 성의 사람들이었다. 일본어에 서툴렀으나 그들은 학생으로서 입학이 허락되었다. 얼마나 그들이 일본어를 배우는 데 열성을 다했든지 짧은 시간에 그들은 드문드문 회화 뿐 만 아니라 강의까지 이해하게 되었다.”
 
정빈은 당시 남녀 학생 합하여 50인 정도가 공부한 동경성서학원의 형편과 학과 수업에 대해 고국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신문>(1906년)을 통해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동경성서학원은 육년 전에 창립한 것인대 교사는 미국 사람 길보른 래호 이돈니량씨와 일본 사람 중전중치와 셰미철삼랑이니 학원의 교수하는 일은 이 두 사람이 주장하고 학도는 남녀 병하여 오십 여인인데... 성경 공부는 등급이 없이 다 일층으로 교수하고, 과정은 신구약 중에서 혹 신학과도 있고 강의도 있어서 오전 구시부터 십일 시까지 교사가 특별히 가르치고 그 외에는 자기가 각기 공부하고 오후면 번차례로 남녀가 패패로 갈라 나아가서 길 전도도 하고 밤이 되면 전도관이 따로 있어서 그 곳으로 모여 개회하고 전도하다가 밤 열 시가 지나야 잘 자리로 돌아오고”
 정빈은 동경성서학원에서 주로 성경에 관한 공부와 노방 전도 및 호별 방문 등 전도 실습에 대한 것을 배웠는데, 특별히 심프슨(A. B. Simpson)에 의해 주창되고, 후에는 웨슬리(Wesely)신학과 함께 한국성결교회의 교단신학으로 형성된 '사중복음(The Fourfold Gospel)'에 대해서 공부하게 되었다. 정빈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곳에서 믿는 목적의 제일 특별한 조목은 네 가지이니, 제일은 구원(救援)이오, 제이는 성결(聖潔)이오, 제삼은 신유(神庵, 약 아니 쓰고 기도만 하여 나음을 받는다)요, 제사는 재림(再臨)이라는 것이 다른 교회보다 다르다.”
 정빈이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세 번째 한국 유학생으로 이장하(李章夏)가 동경에서 그들과 합류하였다. 이장하는 여가의 시간에 찬송가를 한국어로 옮겼고, 정빈은 많은 책들을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다.
3.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의 개척
 1907년 5월 2일, 정빈은 김상준과 함께 동양선교회 소속인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정빈은 그 해 5월 30일에 김상준과 함께 경성 종로 염곡(鹽谷)에 다 쓰러져 가는 조선식 기와집 몇 칸을 세내어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 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복음전도관을 개설하니, 이로써 한국 땅에 외국 선교사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성결교회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물론, 한국에 선교를 시작하기 전에 동양선교회(東洋宣敎會)의 카우만과 킬보른이 정빈이 입국할 때 함께 내한하였지만 이들은 조선이 선교 사역지로서 합당한지 그 여부의 가능성을 확인하려는 시찰이 주목적이었지, 본격적인 선교 사업의 착수는 시행하지 않았다. 당시 동양선교회는 인적, 재정적인 부족으로 인해 일본 선교에 있어서도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한 개척기였다. 동양선교회의 기관지인 Eletric Messages에서는 처음 전도관을 매입할 때 재정적인 원조를 하였지만, 그것을 다 인정한다 해도 염곡에 다 쓰러져 가는 구옥(舊屋) 몇 칸을 세(貰)로 빌리게 되는 정도였고, 정빈은 이곳에서도 쫓겨나 셋집을 몇 번이나 옮겨 다니는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카우만과 킬보른은 1907년 내한 후 2주 만에 일본으로 그냥 돌아갔다. 이처럼 동양선교회가 조선에서의 선교 사업을 시작할 만한 여유를 가지지 못할 때에 최초로 한국성결교회를 창립함으로써 자국인의 모국 선교(母國 宣敎)의 장을 열었던 정빈은 이미 1906년 동경 유학 시절 그곳 복음전도관에서 한 주간에 수십 명씩 결신하는 부흥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가슴 속에는 한국 땅에서의 복음전도의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다 : 
 
 “주 앞에 일을 마쳐 가지고는... 우리나라 교회(敎會)에도 이와 같이 하였으면 좋겠다 하였소.”
 동족이 동족에게 직접 복음을 전함으로써 자국인이 동족 선교의 장을 연 선교적 주체로서의 자생적 개척의 역할 감당은 외국 선교사의 주도로 이루어진 장로교, 감리교 와는 다른 모습으로 이 민족사에 비추어졌다. 한국 성결교 창립의 주역인 정빈은 처음부터 특정한 교파 의식을 갖지 않고, 일본에서 공부하고 실습하여 익힌 전도 방식으로 악대와 가두 전도 연설, 호별 방문에서 복음을 전하여 결신시키고, 결신자들은 인근 다른 교파 교회로 인도하였다. 이명직(李明植)은 『약사(略史)』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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