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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성결교 정체성의 뿌리를 찾아서(2)

기사승인 [488호] 2020.07.22  17:4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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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성결교 교단전환 100주기를 앞두고 성결교창립자 ‘정빈’과 ‘김상준’을 집중 조명한다

정상운 박사 (교회사)본지논설위원, 성결대5-6대총장,성결대 교수

정빈 편 - 한국성결교회 창립자 정빈의 생애와 사상 

I. 정빈의 생애

2. 동경성서학원과 일본에서의 활동

 정빈은 1905년 7, 8월경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정빈이 일본 유학을 떠난 지 3, 4개월 후인 1905년 11월 17일 서울에서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굴욕적으로 체결되고 교회의 비통은 극에 도달하였다. 정빈은 이 당시 참담한 시국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

 “대저 이 세상에서 한국 사람이 되고 어찌 기쁨이 있으며 어찌 감사함이 있으리오. 오늘날 우리의 지위가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 말할 수 없이 외국가 있는 자나 내지(內地)에 있는 자나 이 셰상 영광은 조금도 없으니 ... 지금 우리들이 만 번 어려운 가운데 쳐하였을지라도 내지 전정(前程)의 실낱 같은 명맥이 아니며 ... 신의 날개 아래로 모으시는 때요, 은혜를 가지시고 비 주듯시 하려 하시는 시절이라. 이제부터는 낙심된 자가 위로를 밧을 때요. 울든 쟈가 장차 웃을 날이 잇을 터인데 하나님의 집사 여러 자매 형제의 소임이 어찌 분주하지 아니하리오.”

  정빈은 구한 말 일본에서 제국주의의 횡포와 침략을 막아 내지 못하고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할 불운한 위기에 처하게 되자 기독교로의 입신을 통하여, 즉 한민족의 회생(回生)의 기회를 기독교 안에서 발견하고자 하였다. 정빈의 유학 시절은 일제에 의해 주권이 사실상 빼앗기고 침략의 마각(馬脚)이 여실히 노출된 울분과 참담의 시기였다.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로 신문물을 수용하기 위해 도일한 초기 일본 유학생들은 자연히 그들 스스로의 조직과 일종의 민족적 사명감에서 하나의 집단적 활동체를 필요로 하였다. 이에 일본에서 조직된 최초의 일본 유학생 단체가 ‘조선인 일본 유학생 친목회’였다. 그러나 이 단체가 해체되고 ‘제국청년회’ 가 새로 조직되었는데, 얼마 후 다시 해체되었다. 이후에 약간의 공백기 뒤에 지연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학파로 분파되면서 다시 유학생 조직이 결성되었는데, 그 중의 한 단체가 1905년 겨울경에 조직된 태극학회(太極學會)였다. 
 이 태극학회는 주로 관서 지방의 유학생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학회는 일본에 처음 발을 들어놓은 유학생들의 일어 학습을 돕는 것이 발단이 되어 유학생들의 친목과 학술 연구에 목적을 두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나, 이러한 창립 의도와는 달리 사실상 그 이면에는 민족 주체 의식의 확립과 철저한 국가 관념 속에 외침(外侵)으로부터 무너지는 위태로운 조국 현실을 직시하여 구원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 정빈은 태극학회의 청을 받아 매 주일마다 태극학회 회원 가운데 기독교를 알기 원하는 유학생들에게 설교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의 내용이 『태극학보(太極學報)』(1905년 창간호)에 실려 있다: 
 
 “본회 회원이 기독교를 연구하기 위하여 성서학원에셔 성서전공(聖書專攻)하시는 정빈씨께 매일 총회일에 30분씩 설교하기를 촉탁(囑託)하다.”

 이렇게 태극학회에 연결되어 성서를 가르치는 중에 기독교를 전하면서 그들의 모임에 자주 회동하였으나, 정빈은 일제에 대항하는 정치적 구국 운동과는 깊은 관계를 갖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정빈은 십자가 외에 다른 것에서는 이 나라의 소망스런 전정(前程)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신문>(1906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러나 나의 기쁘고 감사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왕부터라도 우리의 전정은 예수교로야 터를 완전히 할 줄로 생각하고 교회가 장성하기만 기도하며 바라더니”

 가족을 뒤로 남겨 둔 채 도일(渡日)한 1905년 가을 어느 날, 정빈은 김상준과 함께 외국인에게는 낯선 전통 한국식 복장으로 동경성서학원에 나타났다. 호기심에 찬 선교사들과 일본 사람들이 뛰어나오자 두 한국인은 웃으며 넙죽 인사하였다. 아무도 그들의 신원을 알 수 없었는데, 갑자기 한국인 둘 중의 한 사람이 큰 웃음을 지으며 “할렐루야!” 라고 소리치자, 킬보른이 이에 “아멘!" 으로 화답하였다. 


 곧 두 사람은 동경성서학원의 교수, 학생들(중국인 학생 1인)과 한 가족이 되어 신학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정빈은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일본 말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고, 얼마 안 가서 그는 일본 말을 말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카우만 부인은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들은 일본에서 전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학생들을 훈련시킨다는 동경성서학원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그들의 이름은 한국에서 잘 알려진 이, 김, 그리고 정씨 성의 사람들이었다. 일본어에 서툴렀으나 그들은 학생으로서 입학이 허락되었다. 얼마나 그들이 일본어를 배우는 데 열성을 다했든지 짧은 시간에 그들은 드문드문 회화 뿐 만 아니라 강의까지 이해하게 되었다.”

 정빈은 당시 남녀 학생 합하여 50인 정도가 공부한 동경성서학원의 형편과 학과 수업에 대해 고국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신문>(1906년)을 통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동경성서학원은 육년 전에 창립한 것인대 교사는 미국 사람 길보른 래호 이돈니량씨와 일본 사람 중전중치와 셰미철삼랑이니 학원의 교수하는 일은 이 두 사람이 주장하고 학도는 남녀 병하여 오십 여인인데... 성경 공부는 등급이 없이 다 일층으로 교수하고, 과정은 신구약 중에서 혹 신학과도 있고 강의도 있어서 오전 구시부터 십일 시까지 교사가 특별히 가르치고 그 외에는 자기가 각기 공부하고 오후면 번차례로 남녀가 패패로 갈라 나아가셔 길 전도도 하고 밤이 되면 전도관이 따로 있어서 그 곳으로 모여 개회하고 전도하다가 밤 열 시가 지나야 잘 자리로 돌아오고”

 정빈은 동경성서학원에서 주로 성경에 관한 공부와 노방 전도 및 호별 방문 등 전도 실습에 대한 것을 배웠는데, 특별히 심프슨(A. B. Simpson)에 의해 주창되고, 후에는 웨슬리(Wesely)신학과 함께 한국성결교회의 교단신학으로 형성된 '사중복음(The Fourfold Gospel)'에 대해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신문>(1906년)에서 정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곳에서 믿는 목적의 제일 특별한 조목은 네 가지이니, 제일은 구원(救援)이요, 제이는 성결(聖潔)이요, 제삼은 신유(神庵, 약 아니 쓰고 기도만 하여 나음을 받는다)요, 제사는 재림(再臨)이라는 것이 다른 교회보다 다르다.”

 정빈이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 번째 한국 유학생으로 이장하(李章夏)가 동경에서 그들과 합류하였다. 이장하는 여가의 시간에 찬송가를 한국어로 옮겼고, 정빈은 많은 책들을 번역하는 작업을 하였다.

정상운 박사(교회사)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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