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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高峯) 김치선의 개혁신학 사상의 특징(2)

기사승인 [487호] 2020.07.08  18:2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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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통 복음주의 신학 강조한 김치선 박사

1. 정통 복음주의 신학에 근거한 민족복음화운동 효시

그는 개혁파 신학교인 고베(神戶) 중앙(中央)신학교(미국 남장로교에서 세운 1907년 세운 고베신학교와 1903년 북장로교에서 세운 전도동지관, 1920년 오사카(大阪) 신학원으로 개명, 다시 두 신학교가 1927년 합병하여 개명한 개혁파 신학교,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을 수용하는 역사적 개혁파 로선을 따름)에서 수학(修學)하고 1930년 졸업하였다. 고봉은 보수적인 개혁신학교인 고베신학교에서 정통개혁신학을 배웠다. 그리고 일본 선교사로 사역한 영재형 목사를 따라 다니면서 일본에 사는 한인 교포들에게 전도하면서 영재형 목사의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개혁신앙을 배웠다.

고봉은 영재형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유학하여 1933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신학석사를 취득하였다. 고봉은 1929년 프린스턴신학교의 좌경화에 반대하여 필라델피아에서 세워진 웨스터민스터신학교에서 정통개혁신앙을 배웠다. 그리고 고봉은 1935년 미국 달라스신학교에서 「모세오경의 모세저작권」(The Mosaic Authorship of the Pentateuch)으로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조직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제는 구약에 관한 제목이었다. 그는 1930년대 김재준, 유형기 등이 평양신학교에 도입한 모세오경 문서설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성경신학입장을 가졌고, 박형룡과 박윤선이 가졌던 정통개혁신학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고봉은 학위를 받고 1935년 귀국한 후 1936~1937년 고향인 함흥 서호리에서 목회 활동하다가 신사참배를 피하기 위해 1937년 8월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중앙교회(神戶中央敎會), 동경 신주쿠중앙교회, 메구로(目黑) 한인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1944년 귀국하였다. 고봉은 1944년 장로교회인 남대문교회(1885.628 알렌 선교사댁에서 개척 설립) 제6대 담임목사로 취임한다. 당시 남대문교회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한국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교회가 서울역 앞에 있었기 때문에 북에서 다니러 오는 나그네들이나 남에서 서울로 상경한 사람들, 그리고 일본에서 귀국하는 사람들이 늘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따라서 이 교회는 전국적으로 상당히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교회였다.

해방이 되자 3백만 구령운동을 일으켰다. 1946년 2월 8일, 이승만(李承晩)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金九)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통합하여 출범한 사회운동단체이자 정치단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에 많은 목회자들이 가담하였다.

고봉은 정치활동이나 주류교단 활동에 참여하지도 않고 3백만 구령운동이란 제3의 길을 추구하였다. 그는 민족복음화 운동에 전념하여 3백만 구령운동을 일으키면서 주경야독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1948년 야간인 대한신학교를 설립하고 신학생을 길러내었다. 그는 장로교 총회신학교에서 1951년에서 1960년까지 9년 동안 교수로서 구약학을 가르쳤다. 그는 그가 설립한 대한신학교에서 구약학, 신약학,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그는 남대문교회 담임목사요 장로교신학교의 교수로서 활동하였고, 강의실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학생들에게 회개와 함께 민족 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할 것을 당부하였고 “한국의 예레미아”라고 불리었다.

2. 보수적, 성실하고 실천적 인격 신앙

고봉은 마을 서당의 훈장이자 개혁 개방의 향촌의 민족주의적 유교 지식인으로서 기독교가 서호리에 들어오자 누구보다도 먼저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고 교회 영수(領袖)가 되었던 김응보 옹(翁)의 영향을 받아 신앙인이 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되던 암울한 시기에 10대(代) 소년으로 6년이나 매일 새벽 내호교회 새벽기도회에 출석하였고, 그 시기에 그는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신앙을 가졌고, “너는 내 것이다”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으로 함흥에 와 있던 영재형 선교사가 서호리를 방문한 것이다. 김응보 옹(翁)은 어린 고봉의 신앙과 영특함에 대해 칭찬하며 학업 지속하기에 가정 형편의 어려움에 관하여 영재형 선교사에게 말하면서 신원을 보장하겠다고 그를 추천하였다. 이 말을 들은 영재형 선교사는 '그렇게 유망한 학생이라면 자신이 키우면서 공부시키겠다'하고 고봉을 함흥 발룡산 기슭에 있는 자신의 집에 데리고 가서 사환 일을 시키며 공부하게 했다. 그리하여 어린 고봉은 영재형 선교사 집으로 가게 되고 가족들은 장전을 향해 화전민으로 이사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김영한 박사(숭실대 명예교수) dsglory3604@nate.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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