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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 김치선의 개혁신학 사상의 특징(1)

기사승인 [486호] 2020.06.26  11: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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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통 복음주의 신학 강조한 김치선 박사

머리말

고봉(高峯) 김치선(金致善, 1899-1968)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보수적 개혁주의 신학자로서의 신학적 업적보다는 대신교단과 대한신학교 창립자라는 영적 유산과 “한국의 예레미아”라고 불리어졌던 그의 목회적 감화력과 민족 복음화운동의 창시자로서 더 가까이 다가온다. 그는 미국 유학하여 구약학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엘리트 신학자로서 바로 현장목회에 투신하여 회개와 복음화를 강조한 목회를 하였고, 그의 목회는 항상 결실이 있었다. 민족복음화 운동에도 회개가 주제였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회개가 중심된 목회는 개혁신학의 전통에서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봉은 설교문과 신학의 글이나 강의안을 남겼으나 그의 전공인 구약학에 관해서는 박사학위 논문 「신명기의 모세저작」(Kim, Chi Syun. The Mosaic Authorship of the Pentateuch. Evangelical Theological College, 1935; 최선 역, 『김치선 박사의 오경과 모세』. 서울: 선교횃불, 2015)과 『구약사기(舊約史記)』 외에는 학술적 논문이나 저서를 남기지는 아니하였다. 그는 1948년 대한신학교를 세웠고 1951년부터 1960년에 총회신학교에서 구약학을 강의하였고 1955년에 391쪽이나 되는 상당한 분량의 신학적 저서 『구약사기(舊約史記)』를 출판했으나 한국구약학회에서 그의 학술적인 논문과 저작에 관하여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고봉은 구약사와 함께 에스겔, 소선지서와 함께 예레미야서를 강의하였다. 1950년대 선지서에 대한 논문이나 저서가 적었던 시기에 현재 세 권이 남아 있는 그의 구약과 관련된 강의안 소개와 평가는 없다. 구약학자로서의 그의 위상과 기여는 묻혀지고 있다. 이제 한국개혁신학회가 그의 학문적 위상과 기여를 밝혀야할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고봉이 신학적으로는 근본주의 신학자라는 평가도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고봉은 장로교가 합동과 통합으로 나누어졌을 때 제3의 교단인 대신 교단의 창립자요 교계의 영적 지도자로서 위상을 가지고 있다. 고봉은 그의 인격 안에 보수신앙과 애국사상이 하나로 결합된 민족 지도자로서 기독교 1세대로서 근본적으로 역사적 개혁신학을 계승하고 이것을 목회와 신학교육에서 회개와 민족복음화로 실천하고자 했던 목회자요 신학자로서 민족 복음화운동라는 위대한 유산을 한국교회 후손들에게 남겨주었다. 필자는 고봉의 개혁신학사상을 그의 다음 11가지 특징으로 제시해보고자 한다.

1. 정통 복음주의 신학에 근거한 민족복음화운동 효시

고봉은 함경남도 함흥(읍 서호리 바닷가 어촌)에서 조부가 40척의 배를 소유한 선주(船主)인 유복한 가정에서 출생했다. 10대 청소년기 부터 독실한 신앙으로 애국정신을 가진 그는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함흥지역의 리더로 낙인찍혀 1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형(刑)을 살고 나왔다. 함흥으로 돌아와 학업에 전념했고 선교사 함흥 파송 캐나다 선교사 영재형(Luther Lisger Young, 榮在馨, ?-1949)의 영생중학교(중고등 합제 5년제)를 1922년 졸업했다. 영재형(Luther Lisger Young, 榮在馨)은 캐나다 선교사로서 한국으로 귀화한 캐나다계 한국인이다. 그는 1906년부터 함흥지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고 가끔 서호리에 오곤했다. 김응보 옹은 영재형 선교사에게 어린 고봉의 어려운 형편과 아울러 영특함과 착실함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신원을 책임지겠다고 추천하자 엄재형 선교사는 그런 유망한 학생이라면 자기가 키우고 공부시키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여 어린 고봉과 영재형 선교사 사이에 인연이 생겨난 것이다. 당시 에큐메니컬 운동의 일환으로 당시 캐나다 교회는 서로 연합하게 되는데, 영재형 선교사는 이 캐나다 연합교회에 합류하지 않은 잔류파 캐나다 장로교회에 소속된 철저한 개혁주의자 선교사였다고 한다. 예장 대신의 신학적 정체성이 이 선교사의 신학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는 영생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였다고 한다.

고봉은 장로교 미션학교인 영생중학교에서 특히 그의 양(養)아버지가 되어준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영재형 목사로부터 민족을 사랑하고 하나님 주권 신앙을 배웠다. 연희전문학교 영문학과 입학하여 수학하였고 1927년에 졸업하였다. 그리고 평양신학교에서 한학기 수학하였다. 고봉은 장로교신학교인 평양신학교에서 개혁신학을 배웠다. 그리고 일본으로 전지 파송된 영재형 선교사의 권유로 평양신학교를 자퇴하고 일본에 유학했다. 

김영한 박사(기독교철학, 숭실대 명예교수) dsglory3604@nate.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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