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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2)

기사승인 [485호] 2020.06.18  13:5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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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6·25 한국전쟁이 성결교회에 미친 영향과 제언

정상운 박사(교회사) 

성결대학교 제5-6대 총장 

성결대학교 교수

  
 
   1) 성결교회에 미친 영향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의 조인과 함께 20세기 한국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그리고 20세기 세계사의 한 중요한 전환기적 사건이었던 전쟁이 멈추었다. 그러나 어떤 변형 어떤 발전으로 각색되면서도 그것의 원상은 현대 한국사의 자장(磁場)을 이루며 많은 역사의 부분들이 그것에 흡인되고 있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전쟁과 그 여파는 사회현상의 세 가지 측면인 사회 질서와 규범, 퍼스낼리티를 변형시키거나 손상시켰고,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의 여러 부분에서 작용하고 있다. 한국전쟁은 한국성결교회에 영향을 미친 바 그것은 몇 가지로 나누어 분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6·25 한국전쟁은 남과 북에 산재한 성결교회를 남한 중심의 성결교회로 이동하여 편중화 시키는 결과를 낳게 했다. 전쟁은 한국사회를 크게 변형시켰지만, 가장 큰 변화는 피난민으로 인한 대규모의 인구 이동과 기존의 사회계층의 질서를 붕괴시킨 것이다. 1944년에 남한의 인구는 1,588만 명이었으나 광복 후 1949년에 이르러 2,019만 명으로 폭증하였다. 1945년 이후부터 1953년 정전까지의 북한 태생으로 북에서 남으로 이동한 순수한 월남자 인구는 84만명을 약간 상회하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대로 이 기간 동안 대략적으로 130여만이 북에서 남으로 월남하였는데, 북한 지역의 성결교 교역자들도 대부분 이 기간 동안 남으로 이동함으로 지역적으로 반쪽에 불과한 남한 중심의 성결교회로 발전하는 남한 편중화라는 불균형을 보이고 있다.

 둘째, 6·25한국전쟁은 동란 초기에 총회와 신학교 핵심 교역자들의 납북으로 인해 지도력의 공백을 보였고, 이것은 신사참배 문제로 자숙하던 이명직 목사를 다시 성결교회 일선으로 복귀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이 일은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역사적 명분을 잃고 세대교체로 인한 지속적인 개혁 발전도 꾀하지 못한 채 해방 이전의 성결교회와 별다를 바 없는 답보현상을 가져오게 하였다. 일제 당시 성결교회를 이끌었던 이명직 목사는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이건 교장, 박현명 총회장의 납북으로 인한 지도력 공백의 기간에 교단 총회장과 신학교 교장 그리고 활천 주간, 발행인을 맡게 되었다.
 
 셋째, 6·25한국전쟁은 일제 당시 1940년 10월에 들어와 일제에 의한 강제적인 선교사 추방을 통해 얻어진 정치적 자치권 행사에 있어서 경제적인 문제로 동양선교회에 예속되고, 향후 그 관계를 다시 조율해야 하는 결과를 갖게 하였다. 한국성결교회는 해방 이후 교단 명칭에서 '동양선교회'를 빼고 국호인 대한민국을 반영하여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명명하고, 외국선교회에 종속되지 않는 자주적인 교단 운영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생존' 이라는 절대적인 필요로 인해 동양선교회의 경제적인 원조를 받게 됨으로 동양선교회와의 관계가 복원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의 한국성결교회와 동양선교회와의 정치적 관계는 해방이전 이사회의 지배를 일방적으로 받는 종속적 관계가 아닌 건설적인 상호 협력관계로 발전되어 나간 것을 볼 수 있다. 1955년 개정된 헌법은 해방 후 가진 1회 재흥총회에서 헌법 개정을 결의하고, 다음 해인 1947년 제 2차 총회에서 개정한 이사회 제도를 폐지하고 대의정치인 총회제도를 채택한 것을 그대로 표방하고 있다. 다음은 1955년 개정헌법(『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제10회 총회의사록』) 중의 '제1조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기원 및 연혁‘의 일부분이다.
 
  1940년 10월에 한국에 주재하던 선교사의 철귀를 계기로 하여 한국성결교회는 비로소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 이날 한국이 일본제국의 가혹한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니 - 기독교조선성결교회(基督敎朝鮮聖潔敎會)라는 이름으로 일어나 동년 11월 9, 10 양일에는 제1회 총회를 서울에 소집(召集)하고, 제정된 헌법(憲法)을 발표(發表)하였으니 이것이 본 교회의 획기적 또는 역사적 발족의 제일보였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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