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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메니우스 심층분석 (12)

기사승인 [461호] 2019.10.23  16: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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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인 인물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신앙

정일웅 교수(한국코메니우스 연구소 소장,전 총신대학교 총장, 본지 논설위원)

3) 코메니우스의 학문에 관한 현대학자들의 평가

이러한 코메니우스의 실천 지향적인 신학의 특징은 역시 종교개혁자들이 고집한 어거스틴적인 종말론적인 신학의 한계(현세와 종말의 관계에서 지나친 이원론적인)를 뛰어넘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천년왕국(주기도문)의 종말론을 지향한 것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코메니우스의 우주론적이며, 창조신학적인 그리스도 중심의 문화신학적인 통찰은 20세기 초엽에 화란의 개혁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가 하나님의 주권영역을 일반은총의 영역을 포한 한다는 사실을 밝혀준 것과도 일맥상통하며, 오히려 그 일반은총의 영역(자연신학)을 코메니우스의 신학은 벌써 하나님의 계시에다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 예리한 포괄적이며, 개방성을 지닌 미래지향적인 신학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2.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후예인 형제연합교회의 신앙역사와 코메니우스의 신학 

  원래 형제연합교회(Unitas fratrum)는 루터의 종교개혁보다 약 100년 먼저 보헤미아에서 시작한 종교개혁자, 얀 후스(J.Hus,1369-1415)의 신앙사상과 개혁사상을 가장 충실하게 따랐던 그룹 중 하나였다. 후스(J.Hus)는 1405년경부터 프라하 대학의 설교자로, 교수로, 그리고 마지막에 그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영국의 위클리프(J.Wycliffe, 1324-1384)로부터 받은 성경에 근거한 종교개혁적인 사상은 더욱 성장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비성경적인 가르침과 사제들의 타락상을 비판하면서, 복음의 설교를 통하여 종교개혁을 부르짖게 되었다. 그는 그러한 행동으로 프라하 대학의 총장직에서 파면을 당하면서도, 그의 종교개혁의 외침(설교)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를 콘스탄츠 종교회의 중, 종교재판에 넘겼고, 그를 화형 시키고 말았다. 가톨릭교회의 이러한 잔악한 행동에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지역의 귀족들과 백성들은 크게 분노하게 되었고, 여러 그룹의 후스 추종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첫 번째 추종자들은 ‘타보르’(tabor)란 도시에서 시작한 타보리텐파(Taboriten)들인데,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복음과 칼을 함께 사용하는 정치적으로 매우 급진주의자들이었다. 두 번째 추종자들은 양영성체파(Utraquisten)로 불리는 자들인데, 그들은 성찬의 떡과 잔을 함께 분배하기를 요구했으며, 가톨릭의 성찬의 떡과 잔을 동시에 베푸는 술책에 휘말려 대부분 다시 가톨릭교회로 되돌아가도 말았다. 그리고 세 번째 추종자들이 형제연합교회(Unitas fratrum)였는데, 이들은 타보리텐 파에서 이탈된 사람들, 소수가 중심이 되어 1440년경에 새로이 후스의 개혁 정신을 추종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복음과 칼이 필요함을 주장하는 타보리텐 파들의 생각에 반대하였는데, 새로운 개혁적인 복음운동을 시작한 최초의 사람은 취첼츠키(P.von Tchichelcky,1380-1452)라는 한 평신도였다. 그는 원래 타보리텐 파에 속했던 인물이었지만, 그들의 비 복음적인 태도에 실망하고, 성경 말씀을 따라 순수한 복음에 순종하며 살기를 원하여 그 주변 사람들이 모이면서 시작되었다. 이 그룹은 사도시대의 신앙을 따라 성경의 진리와 복음에 합당한 순종의 삶을 추구했던 매우 경건한 자들이었다. 복음의 진리에 대하여 아주 비타협적인 성격을 보이며, 경건한 신앙과 엄격한 신앙훈련방식 때문에 다른 그룹으로부터 박해를 받기도 하였다. 이들은 성경대로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형제연합교회는 다른 후스파 추종자들과는 달리 진정한 후스 정신의 계승자들로 평가되었다.
  생각하면 코메니우스라는 인물은 형제연합교회의 역사가 약 162년이 지난 후, 1592년에 모라비아 지역에서 출생하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코메니우스가 먼저 형제연합교회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으며, 후에 다시 그는 형제연합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가장 어려운 시기(30년 종교전쟁)에 지도자가 되어, 그 교회의 마지막 감독으로 형제연합교회를 이끌었던 인물이었으며, 그 교회뿐 아니라, 유럽 전체의 기독교에 많은 영향을 미친 신학자요, 목회자였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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