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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알리고 싶은 순교자 이야기(5)

기사승인 [394호] 2018.01.27  23: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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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문 가정을 이룬 순교자 유계준

(평양 산정현교회 1879.4.3.~1950.9.28)

유계준 장로는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지역에서 알아주는 거부였으나 그의 나이 13세에 세상을 떠났고 그는 평양의 한 상점 점원이 되었다. 그의 성실성과 재능이 주인의 마음에 들었고 이윽고 주인의 사위가 되었다. 유계준은 길에서 전도하는 마포삼열 선교사를 통해 감동받고 친구 한석진을 만나 예수님을 영접한 후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다. 그의 부인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술을 얼마나 좋아하고, 많이 마셨는지 몰라요. 그리곤 싸움만 터졌다 하면 치료비를 물어 주어야 했지요. 그런데 중생이란 무엇인지를 남편을 보고 완전히 알게 되었어요. 예수 믿기 전에는 맹수 같았는데 복음이 들어가자 사람이 변해도 어찌 그렇게 변할 수가 있어요?”

유계준은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교회와 민족 앞에 충성을 다하여 존경받는 자가 되었다.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자금 모금에 힘썼고, 독립신문을 은밀히 배포하며 창씨개명과 학도병 제도를 반대하고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한 민족의 거목이 되었다. 회사를 개인의 영달이 아닌 민족 기업으로 키웠고 청지기 사상을 바탕으로 숭덕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당시 교육 사업은 교사들의 월급을 회사 재정으로 충당해야 했던 때다. 또한 양로원을 세워 일제 강점기로 인해 젊은 가족들을 유랑으로, 징병으로 떠나보낸 늙은 부모들을 돌보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조만식 장로와 함께 충성을 다한 교회의 기둥이었다. 특히 1944년 4월 감옥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옥바라지와 가족 돌봄을 5년 4개월간 묵묵히 해냈다. 북한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교회를 지킨 일화가 전해진다. 유 장로는 교회를 헌납하라는 공산당의 요구에 정면으로 맞섰다.“일본 놈들도 교회를 빼앗아가지는 않았다. 차라리 내 목숨을 가져가라. ”그러나 며칠 후 1백 명의 무장 군인이 교회를 징발했고 6.25 동란이 발발한 즉시 공산군은 유 장로를 평양형무소에 수감해버렸다. 그리고 9월 28일 북진하는 국군의 공세에 평양을 버리고 도망하면서 애국 인사들을 형무소에서 총살할 때 유 장로는 주님의 품에 안겼다. 이 때 나이 72세.

유 장로의 후손으로는, 장남 유기원 장로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국립의료원장을, 2남 유기형 장로는 부산의대 교수를, 3남 유기선 장로는 부산에서 의사를, 4남 유기천 장로는 서울대 총장을 역임했다. 5남 유기진 장로는 포로수용소 의사였고 6남 유기묵 장로도 의사이다. 장녀 유기옥 권사는 누가의료원 원장으로, 차녀 유기숙 권사는 국무총리를 지낸 이한빈 박사의 부인이자 숭실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유계준 장로의 후손이 모두 106명인데(2004년 10월 현재) 사회 각계 유명인사로, 명문 가정을 이루고 있다.

김헌곤 목사(문준경전도사 순교기념관 관장) webmaster@n491.ndsoftnews.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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